본문 바로가기
사회복지사를 위한 리터러시/<팀장의 글쓰기> 기초

09. 글쓰기가 사람을 죽인다

by Cplus.Linguist-유진 2023. 12. 21.

끈기 발휘는 옳습니다. 이 길 밖에 없습니다. 끈기를 발휘할 시공간을 관리하는 것이 글쓰기 실력의 요체입니다. 꾸준히 루틴으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삶만이 원고를 만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비즈니스 리터러시에서는 글 때문에 낭패를 보거나 평가가 절하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이 홀로! 생활관리를 잘해서 글쓰기 루틴을 갖자는 기획 <팀장의 글쓰기>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것이 목표였다면 저는 지금까지 하나마나한 얘기만 늘어놓은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루틴 안에서 분투하고 계십니다. 고수의 습성을 이미 가지고 계십니다. 1년마다 보고서를 발간하는 사회복지관의 리터러시 문화가 그 증거입니다.

 

각자도생이라는 악령

여러분의 문화는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이미 해결한 상태입니다. 매해 모두가 합심해서 글을 쓰고 보고서를 발간함에도 욕구가 충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완성도가 더 올라가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다시 던졌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질문을 던지는 상황이 달라졌는데 같은 질문을 던지면 당연히 해결할 수 없죠.

 

정말 큰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가 아닙니다. 글쓰기의 부작용에 몸과 마음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글쓰기에도 그늘이 있습니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다보면 은연중에 를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도 넣습니다. 초기질문은 내가 글을 잘 쓰려면 나는 무엇을 더 해야 할까?’로 변태합니다. 더 노력하고 더 집중해야 한다는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게 됩니다.

 

시간을 더 내면 잘 하게 될까요? 아니요. 하루 3시간의 루틴을 만든 것이라면 리터러시를 삶의 우선순위 3번째 안으로 격상시킨 것입니다. 리터러시가 가족과 평소업무 보다 더 앞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을 더 내면 건강만 해칠 뿐입니다. 그렇다면 집중력을 더 끌어올리면 결과물이 좋아질까요? 시간을 글쓰기에 할애한 것만으로도 집중력은 충분합니다. 글쓰기는 오히려 느슨한 상태에서 해야 결과가 좋습니다. 시야가 넓어지니까요. 여러 가지 루트를 검토하며 순간순간 판단하여서 점진적으로 종착점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더 집중해야한다는 실체가 없습니다. 강박증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상황에 맞지 않은 질문의 기저에는 각자도생이 깔려있습니다. 앞선 두 편의 에세이는 글쓰기는 혼자서 하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보였습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불가피함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홀로 쓰는 작가를 상정했을 뿐입니다. 과장되고 편집하면 개인이 분투하는 이미지만 남습니다. 미디어는 말하지 못한 것이 아주 많습니다. 그것이 고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간을 망가뜨리는 길이라는 것을.

 

혼자 쓰는 것은 해롭습니다. 혼자서 루틴 안에서 분투하면 외적으로 성공이라도 내적으로 곪아터져버립니다. 글을 쓰는 동안 말라갑니다. 쾌활하게 지내려 해도 결국 몸과 마음은 마감시간이 다가올수록 하향곡선을 그립니다. 마감이 끝나기 전에는 글을 쓰기 이전 편안한 때로 넘어가기 힘듭니다. 노심초사하다가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몸도 마음따라 같이 내려갑니다. 두통, 관절통, 치통, 이명 등등 평소에는 없던 증상이 급성으로 나타납니다. 몸이 문제였는지 정신이 문제였는지 헷갈리는 와중에 피폐해집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리터러시를 무인도의 삶에 비유했습니다.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은 자기 발자국도 믿을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텐트 앞에서 본 발자국이 식인종의 발자국일 수 있잖아요? 작은 의심이 커지는 건 순식간. 경계를 격상시켜야 합니다. ‘저 발자국은 내 발자국이라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텐트 안에서 기억을 더듬어봐야 합니다. 하나도 놓치면 안됩니다. 변절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를 완파시키며 진군하는 고대 정복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라도 놓치면 죽는 겁니다.

 

안전하다는 확신이 생긴 뒤에 텐트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경계태세를 유지하며 굴을 채취하러 바다에 나갑니다. 바위 뒤에서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널빤지를 보게 됩니다. ‘이 섬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 뇌에서 비상신호가 울립니다.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해적일 수도 있고 적대국가 출신이라면 어쩌지요? 야생에서는 만에 하나를 대비해 생명을 지키는 쪽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과민반응도 정상반응입니다. 믿을 건 오로지 나의 판단뿐. 강박은 생명줄입니다.

 

악령은 내상을 남긴다

리터러시는 무인도에 내던져진 것과 같습니다. 쓰는 도중에는 맞았는지 틀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혼돈 그자체입니다. 그런데 글쓰기를 무인도생활에 일대일로 은유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무인도 생활과 달리 비즈니스 라이팅은 끝이나니까요. 마감시간이 끝내줍니다. 하늘에서 헬리콥터가 밧줄로 탈출시켜줍니다. 하지만 구출되면 끝인가요? 제안서만 제출하면 끝인가요? 혼란과 불안에 절여진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스트레스는 뇌에 상처를 남깁니다. 게다가 사회복지사는 무인도 감금이 연중행사입니다.

 

비즈니스 라이팅은 실전입니다. 진지하고 심각한 세계입니다. 조직의 이름을 달고 외부로 나가는 문서를 책임지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내가 곧 조직이고 나의 수준이 조직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쓰는 동안 걱정과 불안으로 상처받은 마음은 상황이 종료된 뒤에도 회복되지 못한채 방치됩니다. 무인도 생활은 육체 피로도 역시 누적됩니다. 평소 업무를 마치고 저녁에 글을 쓰기 마련입니다. 이미 지쳐있는데 루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말엔 쉬어야 한다고 하지만 스트레스 받은 상황에서는 휴식모드로 전환하기 어렵습니다.

 

3시간으로 제한했다고 하지만 루틴 안으로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박 중독자처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시간을 넘겨버리기 일쑤입니다. 모니터가 주는 푸른빛에 뇌가 절여지면 각성수치가 올라갑니다. 자려고 누워도 뇌는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한 밤 중 각성은 수면장애를 낳아요. 과로, 수면부족 그리고 스트레스의 삼각지대에 빠지면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중간중간 쉬더라도 글을 시작하기 전에 비하면 심신은 지쳐있습니다. 특히 짧은 기간에 큰 일을 해내야 하는 경우에는 상처가 더 큽니다.

 

체력이 내려가면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옵니다. 건강할 때 도움 주던 내 안에 검열자가 체력이 내려갈 때는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나의 어두운 부분이 나를 집중공격합니다. 이때부터 뇌는 리터러시와 연관된 부정적인 경험만 골라서 보여줍니다. 학창시절 작문시간에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경험, 낮은 국어시험 점수, 성인이 되어도 해독하지 못하는 수능지문 등등 나의 지친 뇌는 리터러시 문화가 부재한 나라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장면으로 드라마를 엮어줍니다. 가스라이터는 언어도 포악합니다. ‘재능이 없다’, ‘실력이 없다’, ‘네 글은 쓰레기다같은 험한 말만 골라서 쏟아냅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시비를 따지기 전에 공격을 당장 멈추라고 일갈해야 하지만 심신이 지치면 저항하지 않습니다. 지쳤으니까요. 망발을 지체없이 인정해버립니다. 실제로 글쓰기에 위축된 날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요. 가스라이팅은 내면화되고 자존감은 소멸합니다. 코너에 몰리면 자기 책상에서 조용히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 “글쓰기는 타고난다!”

 

무대에 한번이라도 올라섰다면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글은 나의 지식수준을 집약해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프로선수가 얼마나 준비를 많이 했던 결과가 좋지 않으면 혹평을 쏟아냅니다. 무대를 망친 가수를 인터넷에 박제해 수십년간 괴롭힙니다. SNS는 우리 모두를 유력인사로 착각하게 만들지요. 바깥에서 들려오는 가혹한 평가를 무시하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좋아요개수만 평균이하여도 시무룩해지잖아요?

 

사람들은 철자와 구두점을 틀리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자라도 틀리면 망신입니다. 하물며 글 한편은 어떨까요? 지식사회에서 나의 글은 내 지식의 엑기스입니다. 글을 공개하는 것은 나의 지적능력을 한꺼번에,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글은 비판의 여지가 항상 존재함으로 글을 어딘가에 제출하는 것은 나의 취약함을 내보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글은 내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글과 나를 동등하게 봅니다. 나 자신도 리터러시 실력을 기준으로 나를 평가합니다.

 

우리는 좋은 글이라는 망령에 시달립니다. 좋은 글은 없지만 좋지 않은 글은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쓴 글입니다. 에세이가 기말고사로 대체된 과목에서 낙제하는 것은 크나큰 스트레스입니다. 하물며 실전에서 탈락은 어떨까요? 제안서가 탈락은 프로선수가 방출 위기에 내몰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두가 괜찮다고 해도 히스토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격과 책임은 여전히 나에게 있습니다.

 

끔찍하죠. 하지만 자업자득입니다. 질문 실패의 결과일 뿐입니다. 피폐함은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상황 가리지 않고 똑같이 두 번 던진 결과입니다. 질문을 잘못 던지니 각자도생하라는 오답이 나오고 오답을 따라가니 나하나도 건사하지 못하게 되는군요. 각자도생은 여러분야에 지옥을 만드는군요.

 

, 구해줘

고수를 따라하다가 이렇게 되었는데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필자를 구해주어야지요. 편집자가요. 미디어는 편집자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글쓰기 문화가 시작된 이래로 편집자는 늘 옆에서 필자를 도와왔습니다.

 

이 기획 초반부터 저는 편집자라는 새로운 역할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팀장의 글쓰기>는 팀장들이 편집자로 키워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난국을 타개할 새로운 질문을 첫 번째 에세이에서 이미 던졌습니다. 꼭 기억합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조직 전체의 문서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