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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도서/논픽션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

by Cplus.Linguist-유진 2019. 10. 28.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 홍기빈, 지식의 날개, 2012

 

보이지 않으면 사라져요. 트로이도 발굴되기 전까지는 전설이었어요. 발굴을 시도한 하인리히 슐레이만을 당시 학자들은 비웃었습니다. 결과는 슐레이만 윈! 그가 발굴한 터에는 트로이만 있는게 아니었어요. 6층으로 이루어져있어요. 트로이 전후 문명이 층층이 쌓여있었다고 합니다. 토사로 뒤덮힌 곳에 도시 위에 후세가 계속 새로운 도시를 세운겁니다. 놀랍습니다. 규모나 구조보다 번성하는 도시하나도 사람들 기억 속에 잊혀진다는 점이 저에게는 놀랍습니다.

 

눈에 안보이면 잊어버리는데 눈에 뻔히 보여도 가치있게 여기지 않으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지요. 자금성이 한때 폐급 취급 받았습니다. 문화대혁명때 홍위병들이 자금성 같은 과거 유적을 타파 대상으로 지목하고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자금성은 저우언라이가 군대까지 동원해서 겨우 지켰다고 합니다. 로마의 콜로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원전에 야구장 2배만한 석조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며 보존한다는 생각은 현대인들의 생각이고요. 대리석 채석장으로 쓰인 적도 있습니다.

 

초대형 건물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데 생각 하나, 단어 하나 뇌밖으로 흘려보내는 건 참 쉬운일입니다. 살림살이. 살림살이는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나도 사는, ‘함께 산다’는 일상어입니다. 사라진 말도 아니고 어려운 말도 아니지요. 역사가 기록된 시기부터 거의 모든 시간 동안 경제는 살림살이를 의미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살림살이는 늘 우리 몸에 딱 붙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 돈이 나타나면 자리를 내주고 구석에 쭈그러지는 말입니다. 효용, 가치, 투자 같은 돈과 연관된 말이 나오자마자 우리가 알아서 진흙더미에 파묻어버리는 말입니다. 한국은 살림살이가 돈 앞에 얼마나 존재감이 없었나는 분명한 수치로 보여줄 수 있는 나라입니다. 17대 대선에서 ‘대박’을 상징하는 이명박은 48%, 2번의 대선에 걸쳐 ‘살림살이’를 외친 권영길은 3% 득표했습니다.

 

의식아래에 파묻힌 ‘살림살이’를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 소장 홍기빈이 발굴중입니다. 그는 자금성이나 콜로세움처럼 주목받고 사랑받도록 ‘살림살이’를 리모델링하고 있습니다. 그는 살림살이라는 평범한 말에 ‘경제학’을 붙여서 이론화하려합니다. 그의 저서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는 복원의 첫삽에 해당합니다. 200페이지짜리 얇은 책에서 ‘살림/살이 경제학’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새 경제모델의 기원과 포부를 보였습니다.

 

1장은 ‘살림살이 경제학’의 개념을 소개합니다. 2장은 돈벌이 경제학이 득세하는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원래 당연했던, 돈도 도구의 하나에 불과했던 중세에서 어떻게 돈이 모든 것을 다 바꿀 수 있는 마술뿅망치가 되었는지 알아봅니다. 3장은 대세의 바람 속에서도 살림/살이 경제학을 주창하는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분투를 담았습니다. 마지막 4장에는 살림살이 경제학으로 얻을 수 있는 지혜와 사례 약간을 담았습니다.

 

‘경제’를 투자나 돈벌이라고 말하는 사전이 대부분입니다.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조달하는 행위라는 뜻’은 좀처럼 찾을 수 없습니다. 대학의 경제학도 투자, 자산가치, 시장 등등의 돈벌이 경제학과 관련된 것만 가르칩니다. 돈벌이 경제학이 득세할 때 반론을 제기한 학자들은 대학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장파여도 언론에서 한꼭지 다뤄주기 마련인데 경제학의 세계에서는 얄짤없어요. 경제학은 곧 돈벌이 경제학입니다.

 

‘경제 = 돈벌이’라는 등식이 뇌 중심에 자리잡은 건 최근 300년 동안의 일입니다. 경제학의 원조는 살림살이 경제학이었습니다. 이코노미는 그리스어로 집안살림이나 가정관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경제 프레임에서는 돈벌이는 좋은 삶을 영위할 때 고민해야할 하부기술 중 하나였습니다. 인류는 최근 300년만을 제외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을 고민하는 행위를 경제라고 알았고 또 모든 것을 고민하며 관리하며 살아왔습니다. 좋은 삶은 돈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완전히 끊긴적은 없습니다. 살림살이가 파묻힌 이 세계가 이상한겁니다.

 

살림살이를 가치의 중심으로 보는 학자는 홍기빈이 최초는 아니에요. 아리스토텔레스, 칼 폴라니, 윌리엄 캅, 소스타인 베블런, 군나르 뮈르달은 살림살이를 중요시하는 경제학계의 소장파가 존재했음을 밝히면서 그들의 업적을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 이 책만으로는 저자가 선배들의 연구와 얼마나 다르고 더 나아갔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돈이 다가 아니라 삶을 총제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미션도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희미해지는군요.

 

그런데 살림살이라는 개념은 사회복지사에게는 더더욱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살림살이 관리는 사회복지사의 일이니까요. 살림살이가 인간활동의 핵심이라는 걸 인지하며 클라이언트의 행복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충족시키려 오늘도 열일하는 사람이 바로 사회복지사 아닙니까. 경제난에 상처입은 이들을 보듬는 방법을 다방면으로 고민하며 발굴하고 실천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클라이언트의 마음과 관계까지도 챙깁니다. 복지관은 이미 살림/살이 경제학을 아는 것 그 이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미래가 되야한다는 걸 구성원 모두가 합의하며 체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사회복지사가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도 있지요. 우선 기뻐합시다. 사회복지사의 비전이면서 생활을 한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는 사실 먼저 사회복지사가 기뻐합시다. 왜냐고요?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문화를 표현하는 개념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개념어는 발음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워야 합니다. 그래야 널리 널리 뻗어나가 오래 오래 남습니다. 그런 말을 만드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 그걸 홍기빈이 해냈습니다!

 

여러분의 이상향에 보다 빠르게 다가갈 수 있는 구동력을 얻었는데 기뻐해야지요. 대중선전할 수 있는 조건이 다 갖추어졌습니다. 이 단어를 뇌 안에 본격적으로 활성화 시키는 작업, 독서를 합시다. 다 알아도 읽어야할 때가 있습니다. 종교인들이 경전 읽듯.

 

이미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많이 자주 사용해야 한다. 복지관 바깥에선 여전히 살림살이는 언제나 돈벌이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돈벌이가 살림살이의 부하였다는 사실을 말하세요. 살림살이가 돈벌이와 비교 조차 될 수 없는 소중한 개념이라는 걸 상식이 되려면 말해야 합니다. 낯선 곳에서 직업을 소개해야할 때, 사회복지의 비전을 쉬운말로 설파해야할 때, 여러분이 고안한 서비스의 가치를 돈벌이 경제학에 찌든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할 때, 스스로 자기 사상을 도전 받을 때, 기획서를 작성하다 막힐 때, 내년도 서비스 아이디어 회의할 때 등등 최대한 많이 그리고 자주 ‘살림살이 경제학’을 사용하시라. 비관계자들에게 더 많이 사용하세요. 뇌 속에 언어가 들어가면서 사람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 책은 오프닝에 해당합니다. 살림/살이 경제학 프레임의 작동원리를 재구성하고 설득하는 것은 오랜 작업일 수 밖에 없겠지요. 저자를 응원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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