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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도서/논픽션

인간증발

by Cplus.Linguist-유진 2020. 4. 12.

증발은 일본식 가출이에요. 귀환 없는 완전 가출. 일본사람들은 삶에서 궁지에 몰리면 증발합니다. 낙방, 실직, 파산, 이혼 등 몰락을 앞에 두고 대안이 떠오르지 않으면 숨어버립니다. 프랑스 저널리스트는 일본이 좀처럼 보여주려 하지 않는 모습을 글과 사진으로 드러냈습니다.

 

레나 모제 글 ,  스테한 르멜 사진 ,  이주영 옭김 ,  책세상 , 2016

 

증발자는 자살자의 3, 1년에 10만명이 사라집니다. 케이스는 많으나 허수입니다. 취재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을 경계하는데다 증발을 입 밖에 내는 걸 금기시하거든요. 운을 땐 정도인데도 우리 동네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라며 확 잡아떼는 과민한 취재원도 있었어요. 통역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증발한 사람들이 모인 게토는 택시도 가길 꺼려하는 곳이에요. ‘나 증발인이오라고 손을 드는 사람도 없거니와 막상 찾아도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지요. 그럼에도 5년 동안 성을 다해 일본 그림자의 정수를 추출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수치심을 느껴서 증발합니다. 시험 망친 대학생, 남편이 바람난 여자, 회계사 시험을 앞둔 취준생, 상사의 책임 추궁 받던 회사원, 조직을 이탈한 야쿠자, 부동산 개발깡패에게 시달린 집주인, 주식투자에 실패한 일가족, 은행대출이 되지 않아 사채에 손댄 부락민, 명예퇴직 당한 엔지니어, 병가 직후 보직해임된 팀장 등 증발을 감행하는 마음에는 모두 수치심이 들어있습니다.

 

일본사회는 특히 실패에 엄격해요. 세상이 패자를 업신여기고 깔보면 수치심이 생깁니다. 일본은 실패를 위로하고 도전을 복돋아주는 사회가 아닙니다. 하락세만 보여도 바로 실패라고 낙인찍고 모멸감을 주는 행동을 취합니다. 저성과자 캠프가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일본기업은 저성과자의 심신재무장을 군대식 훈련소에 아웃소싱합니다. 입소자 1명당 330만원을 내야 하는 임직원재교육학교의 목표는 부족한 점이 많은 직원들을 질서와 순종이라는 바른 길로 다시 인도하는 것입니다. 입소자는 신입사원부터 연봉 3억대 임원까지 다양합니다. 5시 반에 기상해서 군인처럼 훈련받고 저녁에 자기 상관에게 감사편지를 쓰는 13일간의 지옥훈련에 입소자가 끊이지 않습니다.

 

수치심은 당사자만의 감정이 아닙니다. 남겨진 가족들도 증발인을 패배자로 생각하고 수치심을 느낍니다. 가족의 가슴 속에 연민이 아닌 수치심이라니요. 최후의 저지선이 없어진 느낌입니다. 수치심은 당사자와 관계자만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정부도 느낍니다. 증발자들이 모여 사는 산야라는 게토가 도쿄 외곽에 있어요. 에도시대는 범죄자 처형장이었고 훗날 도살장이 되었다가 호황기에는 인력시장이 된 산야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일본사회를 수치심 사회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어요.

 

한 증발자는 일본을 압력솥으로 표현합니다. 일본인들은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도달하면 김을 뿜어내며 사라진다고 은유했습니다. 1990년 압력솥이 더 들썩거렸습니다. 4년 동안 투기 광풍이 불던 1989년 도쿄 주식이 급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동산 가격도 폭락했어요. 6억짜리 집이 1억이 되었습니다. 50만명이 파산한 일본에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이 이어지면서 잃어버린 10에 접어듭니다.

 

증발은 1990년 버블붕괴때 급증합니다. 경제실패는 불행의 여러 모습을 드러냅니다. 부도-이혼-배신-파산은 끝없는 불행 고리가 이어집니다. 이때는 개인 증발 뿐 아니라 일가족 증발도 많았습니다. 90년대 중반에는 야반도주한 사람들의 수가 12만명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야반도주 전문 이사 센터는 엉뚱한 단서를 흘리는 등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사후 조치를 확실히 했습니다. 공중파에서 야반도주를 주제로 드라마로도 제작, 방영했습니다.

 

작정하고 숨는 사람은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자발적으로 숨어서 이름까지 바꾸는 사람은 찾지 못합니다. 흥신소를 이용하려고 해도 하루 50만원의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가족들은 돈을 쓰기는커녕 유지비를 줄이는 선택을 하죠. 증발인이 버리고 간 방의 월세나 각종 세금 때문에 사망신고를 해버립니다.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포기한 증발자는 살아남는 것이 목적입니다. 증발자가 모인 곳에서 이들을 이용한 어두운 경제가 형성됩니다. 무법지대에서는 야쿠자가 세관이고 공권력입니다. 절박한 증발자의 등골을 빼먹는 사채업자, 악덕고용주, 모리배들도 많습니다. 증발자가 모인 동네는 인력시장이 되는데 발주자도 수주자도 모두 꺼리는 일을 할 사람들도 많이 모여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폭때 피폭지역의 청소용역이 증발자에게 알맞은(?) 일입니다.

 

일본은 40-50년 전에 비하면 쇠락했지만 여전히 경제대국이에요. 여전히 전방위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실력을 행사 합니다. 강하게 빛나는 나라는 그에 상응하는 어둠을 안고 있습니다. 관광객 신분으로는 그들이 보여주는 빛만 보입니다. 책은 어둠을 드러내죠. 외지인이 어렵게 그려낸 일본의 그림자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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