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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자료/가라앉는 사람들

우스터시의 러버메이드

by Cplus.Linguist-유진 2021. 2. 1.

19796월의 오하이오 주 우스터의 러버메이드(Rubbermaid 미국 플라스틱 생활용품 제조업체) 공장은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하였다. 공장 내부에서는 막대한 양의 플라스틱이 거대한 금형 주입 기계에 부어졌으며, 녹아서 다시 압축된 플라스틱은 여러 친숙한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시계 부품이 돌아가는 것처럼 거대한 기계들은 보관함, 주방용그릇, 쓰레기통 등 가정용품들을 쏟아냈다. 반세기 가까이 그래 왔던 것처럼 하루 24시간 내내 기계들은 시끄러운 소음을 내면서 미국가정에서 사용되는 물건들을 만들어냈다.

 

러버메이드가 그 유명한 고무 쓰레받기를 제작한 건 1920년대였다. 매우 실용적인 이 쓰레받기는 러버메이드를 가정용품 분야에서 유명 브랜드로 만들어준 첫 번째 작품이었다. 러버메이드는 여러 곳에 공장을 열었지만, 우스터의 아크론 스트리트에 세워진 거대한 그레이스톤 건축 양식의 건물은 이 회사의 심장이자 영혼과 같은 존재였다. 오하이오 북부에 위치한 인구 24,000명의 우스터에서, 러버메이드 공장 직원 1,600명과 인근에 있는 본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직장인 중에 가장 큰 집단이었다.

 

시민 사회의 모범적인 일원으로 러버메이드는 예술에도 공헌해 낡은 극장을 문화 센터로 개조하는 사업을 주도했으며, 시내의 마켓스트리트(Market Street)에 대형 소매점을 열어 중심가의 부활을 촉진했다. 러버메이드는 미국 최고의 기업에 계속해서 선정되었고, <포춘>이 선정하는 최고의 명예인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회사에도 여러 번 선정되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누구도 부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정적인 일자리였고, 한 가족 3대가 같은 회사 종업원 명단에 올라있는 것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32년 동안 일했던 쥬디 보우먼은회사는 거대한 가족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미국의 공업을 침식시킨 힘이 러버메이드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1995년에 월마트와 10여가지 가정용품 공급 계약에 실패하면서 회사는 혹독한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월마트는 공급업체로부터 최저가를 짜내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공급업체들이 비용을 낮추기 위해 해외로 떠나도록 만드는 것으로 악명 높은 회사였다. 월마트는 러버메이드의 공급 가격 인상 요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버메이드는 멕시코, 한국, 폴란드에 공장을 열었지만, 생산의 주력은 여전히 미국이었다. 협상이 실패하자 월마트는 협력 관계를 끊고 다른 공급업체로 돌아섰다. 이 조치가 러버메이드의 미국 내 생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해 말 러버메이드는 생산직 인력 9%를 줄이고 공장 9곳을 정리했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회사 역사상 첫 번째 축소였다. 4년 뒤 회사는 세계적인 소비재 기업인 뉴웰Newell에 인수되었다. 이 회사는 비용 절감과 혹독한 경영으로 유명했다. 뉴웰은 우스터에 있는 생산 부서들을 멕시코로 옮기고 본사를 애틀랜타에 다시 세웠다. 이로써 우스터의 러버메이드 직원 릉 1000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우스터의 러버메이브 직원 중 누구도 회사의 새로운 주인에게 어떤한 기대도 가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직원 감축은 큰 충격이었다. 20031210, 뉴웰은 수개월 내로 우스터 공장을 폐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충격과 불신이 러버메이드를 휩쓸었다. 대다수 직원은 다른곳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 모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수개월 동안 공장은 남은 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비애의 현장이었다. “설비들이 차례차례 조금씩 빠져 나갔죠.” 플라스틱 담당으로 일했던 오펄 드라이스데일은 지역 신문 기자에게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지켜보는 것뿐이었죠. 정말 침울했습니다. 우리 삶의 큰 부분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공장이 문을 닫자 노동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몇 푼 안되는 해직보상금을 다 써버렸고 새로운 직장을 찾으려고 애썼다. 일부는 재취업에 성공했지만, 그것마저도 원래 받던 급여의 30~50%에 불과한데다 복지 혜택도 없는 비정규직이 대부분이었다.

 

쥬디 보우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러버메이드에 입사했다. 32년 동안 그녀는 주말 근무는 물론, 모든 근무조를 돌아가며 일한 경험이 있었다. 거의 모든 업무를 다 해보았지만, 공장이 멕시코로 넘어가기 전까지 그녀가 주로 일한 곳은 인기 있는 고무 욕조깔개 생산 라인이었다.

 

나는 내 일과 동료들을 사랑했죠라고 보우먼은 회고했다. 일에 대한 그녀의 열정 때문에 회사는 판매업체 대표나 상공회의소대표단 같은 사람들이 방문할 때 그녀에게 공장 안내를 맡겼다. 그녀는 그들에게 거대한 생산 설비를 거치면서 제품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보여주고 회사의 간략한 역사를 설명했다.

 

공장이 문 닫을 때 그녀는 관리인 직위로 시간당 13달러를 벌고 있었다. 그녀는 인근의 물류센터에서 러버메이드 제품들을 적재하는 일을 제안 받았지만, 수년간 생산 현장에서 얻은 많은 부상들로 그런 과중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란 점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32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구직 시장에 들어섰다. 그녀는 야간 관리인을 구하는 우스터 대학에 지원했지만, 대학은 지역 중개인을 통해 임시직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청소 일을 하기 위해 새로 들어선 힐튼 호텔에 지원했지만 그들은 더 경험 많은 여성을 원했다. 그녀는 지역 병원의 관리인에 지원했지만 여기서도 일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한 달 뒤 그녀는 지역 학구의 수위로 시간제 일자리를 구했다. 그녀는 일주일에 1~2일 일하며 시간당 7.77달러를 받았다. 만약 전일제로 일하더라도 연간 16,200달러로, 4인 가족 기준으로 빈곤층을 간신히 벗어날 수준이었다.

 

우스터 시는 대표적인 기업을 잃으면서 충격을 받았지만,초기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자 앞서 유사한 경험을 한 다른 지역처럼 최선을 다해 회복하기 시작했다. 시 공무원들은 러버메이드 공장이 시에서 유일한 공장은 아니며, 이를 대체할 다른 회사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직할 만한 다른 회사들로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루크(Luck, Inc), 철강회사 텍포(Tekfor USA), 수력 장비 생산업체 보쉬렉스로스(Bosch Rexroth), 자동차 부품업체 로빈 공업(Robin Industries)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이 공장들도 러버메이드 공장이 없어진 것과 같은 이유로 흔들렸다. 이 회사들이 일자리를 멕시코로 이전하거나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면서 노동자들은 해고되었다.

 

2010년 초, 우스터 시가 있는 오하이오 주 웨인 카운티의 실업률은 11.1%에 도달했다. 세수가 급격히 줄어들자 우스터 지역의 기관들은 허리띠를 졸라맸다. 보안관은 보안관대리 13명을 해고하고 경사 6명을 보안관대리로 강등시켰으며, 도로 순찰관을 21명에서 12명으로 줄였다.

 

러버메이드 우스터 공장 직원들에게 제조업 일자리는 가족이 함께 생계를 꾸려가고 쾌적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언덕 위의 커다란 석재 건물은 그들에게 훌륭한 일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10, 20, 30년을 일하고, 또 가족의 2세나 3세가 대를 이어 그렇게 일하는 것이 흔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이 문을 닫았을 때, 생산직 일자리를 다른 곳에서 찾을 생각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앤드류 바이어스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러버메이드나 다른 회사들이 외국에서 모든 물건을 만든 후, 그 상품만 배에 싣고 미국으로 들여올 거라고 믿었다. 그는 미국에는 창고 말고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통계로 증명이 되었다. 2011년까지 생산직 일자리는 1979년의 1950만 개에서 1160만 개로 줄어들어 79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더 극적인 변화는 남아 있는 일자리의 구성 비율이었다. 좋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1979년에 전체 18.2%였지만, 2011년에는 9%로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해고된 러버메이드 노동자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어떤 이들은 시간제 일자리를 잡았고, 어떤 이들은 비정규직이 되었으며, 은퇴한 사람들도 있었다. 뎁 커틀스 호프먼처럼 새로운 직업 훈련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커틀스는 1년간에 걸쳐 통학버스 운전의 상세한 부분까지 엄격하게 훈련을 받는 과정에 등록했다. 그녀가 이 과정을 이수한다고 해서 통학버스 운전사가 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녀는 도박을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 버스 운전사인가?

 

그들이 아이들을 없애버릴 수는 없죠.

그들이 우리 아이들을 중국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출처: 68 75, (국가는 잘 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도널드 발렛& 제임스 스틸, 어마마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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