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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자료/가라앉는 사람들

존 아귀아르와 시레나 아귀아르

by Cplus.Linguist-유진 2021. 2. 4.

존 아귀아르는 걸프전 참전 군인으로, 1990년 사막의 폭풍 작전 당시 육군 정보 분석 임무를 수행했다. 시카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한 뒤 그는 미 육군의 전설적인 정보 훈련 기지인 포트 후아추카(Fort Huachuca)에서 훈련을 받았다. 애리조나 주 남부의 외딴 곳에 위치한 비밀스런 기지에서 그는 복잡한 신호정보와 독도법을 배웠다.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존은 이라크에 파견되어 보병을 위한 정찰 정보를 제공했다.

 

복무 기간이 끝나자 그는 시카고로 돌아가 고교 시절 연인인 시레나와 결혼했다. 그들은 시카고 교외에 집을 샀고 거기서 딸과 아들을 낳았다. 2002년에 존은 직장이 불안정하다고 느껴 시레나의 부모가 사는 케이프코랄로 이주했다.

 

이주하기 전에 존은 트럭운수 업체의 중간급 관리자였다. 이 업계는 의회가 1980년에 규제를 완화한 이후 만성적인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가족과 함께 플로리다로 이주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그가 일했던 직장이었으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장거리 트럭운수 업체인 컨설리데이티드 프레이트웨이즈(Consolidated Freightways)가 파산 신청을 하고 사라졌다.

 

존 부부는 케이프코랄에 땅을 사서 자신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대로 집을 지었다. 그 집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목장식 1층집으로 침실3, 욕실2, 2대가 들어갈 차고가 전부였다. 화강암 조리대나 자쿠지 욕조 같은 것은 없었으며, 자신들이 감당할 수준으로 기본적인 것만 갖춘 집이었다.

 

우리는 사치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시레나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적절한 곳에 필요한 것을 넣었죠. 우리가 항상 원하던 집이었어요.” 그들은 그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은퇴 생활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존은 건축 자재 회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들의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케이프코랄 시 당국이 상하수도 배관을 연결하려면 2만 달러 의 비용이 든다고 말해준 것이다. 또한 집을 짓고 나자 상하수도를 연결하려면 몇 기다려야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22천 달러를 들여 우물을 파고 오수 정화조를 설치했다. 2만 달러 이상을 추가 지출하게 되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대출을 차환하였다.

 

그들이 처음 대출한 조건은 6% 고정 금리였으나 차환할 때 담보 대출 전문 업체는 변동 금리를 제시했다. “나는 계약이 끝날 때까지도 그게 변동 금리대출인지 몰랐어요.” 시레나는 말했다. “이미 늦은 거죠.” 초기에 월간 상환금이 1,100달러에서 1,400달러로 오를 때만 해도 그들은 그럭저럭 갚아낼 만 했다.

 

하지만 플로리다 경제가 침체하면서 새로 얻은 담보대출의 금리는 계속 올라갔다. 주택 산업과 관련된 자신의 일자리가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한 존은 부업으로 홈디포에서 주당 20~24시간 정도 야간 근무를 했다. 하지만 그때 회사는 지역 사무실을 폐쇄했고, 그는 본업을 잃었다.

 

존과 시레나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과 연금 계좌의 금액을 줄이면서까지 주택 담보대출을 갚기 위해 돈을 긁어모았다. 하지만 월간 상환금은 2,000달러까지 치솟았다. “담보대출 상환금은 계속 올라가기만 했죠.” 존이 말했다. “상환금을 갚고, 또 갚고, 또 갚으면서 도대체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대출업체와 협상해 금리를 낮춰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 하더군요.” 시레나의 말이었다.

 

존 부부는 주택 압류 사태를 유발한 거대한 힘에 휩쓸렸다. 담보 대출을 해준 업체는 실제로 대출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가족에게 대출을 조정해 재정적으로 회복할 때까지 집을 가지고 있도록 해줄만한 이유가 없었다. 담보대출 업체가 계속 그들의 요청을 귀담아 듣지 않자, 2009년에 존 부부는 극도로 치솟은 상환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택이 압류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주택 압류 법정에 출석하기 바로 전에, 대출 업체는 그들 부부가 집을 공매하는 것을 허용했다. 집은 손해를 보고 금세 팔렸으며, 그들은 시레나의 부모 집으로 이사했다.

 

플로리다에서 일자리를 잡지 못하자 존은 시카고의 트럭운수 업체에서 출하 담당 일자리를 얻어 떠났다. 부부는 자녀가 다니는 학교가 훌륭한 교육을 제공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시레나와 두 자녀는 플로리다에 남았다. 14살인 메간은 수의사가 되고 싶어 했고, 11살인 제이콥의 장래 희망은 로봇 기술자였다. 존은 시카고에 일자리를 잡은 후로 거의 1년간 자녀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당뇨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등 예상치 못한 건강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족이 한곳에 모이는 때는 전화할 때뿐이었다.

 

시레나는 케이프코랄에 집을 지었을 때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이었다고 회상한다.

 

우리는 가정이 있고, 좋은 직장을 다니고, 직접 기은 좋은 집에, 개와 고양이도 기르면서, 행복했죠.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멀어져 갔죠. 우리는 그저 그때의 우리 삶을 되찾고 싶을 뿐이에요.”

 

과거에는 모든 것이 지금과는 달랐었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 끝난 뒤 연방 정부는 월스트리트와 은행, 투자자들의 금융 술책 따위는 허용하지 않는 주택 프로그램을 잘 감독했다. 따라서 존이나 다른 전역 군인들, 수백만 미국 중산층의 삶을 파괴시키는 따위의 술책은 생길 수 없었다.

 

우리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있었죠.” 시레나가 말했다. “이제 그 꿈은 우리에게서 떠나갔어요.”

 

 

출처: 256-263(국가는 잘 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도널드 발렛& 제임스 스틸, 어마마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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