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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자료/가라앉는 사람들

케빈 플래너건

by Cplus.Linguist-유진 2021. 2. 3.

직장에서의 마지막 날, 케빈 플래너건은 사무실에서 몇 개 안 되는 개인 물품들을 상자에 담아 자신의 포드 레인저 픽업트럭에 싣고 7년간 일해 왔던 건물을 떠났다. 그는 회사 주차장의 제일 아래층에 차를 세우고 앞좌석에 앉은 채로 12게이지 레밍턴 산탄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41살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살았다. 일이 해외로 옮겨 가면서 프로그래머로서 그의 경력도 끝났다. 미국의 전통적인 일자리를 해외로 내보내는 아웃소싱은 미국에서 성장하는 몇 안되는 사업이다.

 

케빈은 대학 교육을 받았고 어떤 일이건 열심히 했다. 그는 마지막 직장이었던 캘리포니아의 콩코드에 있는 뱅크오브아메리카를 포함하여, 샌프란시스코 만과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이전이 직장에서 우수한 경력을 쌓아왔다. 동료들은 그를 높게 평가했다. 어떤 동료는 그를 프로그래밍의 신이라고 불렀으며, 다른 이는 프로그램 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그가 거의 10초 만에 풀어주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분석적인 사람이었고 여러 문제를 잘 해결해 왔지만, 결국 자신의 직업에 관한 문제에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가 일했던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요즘 많은 회사가 직원에게 하는 것과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 수년간 헌신적으로 일해 왔지만, 어느 날 직원들은 교체될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헌신적으로 일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충분한 교육을 받지 않았거나 자격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들이 교체된 이유는, 연방 정부의 정책으로 회사가 다른 이들을 훨씬 싸게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의 압력으로 의회를 통과한 미국 정부의 고용 정책에 따라 미국에 취업 허가를 받게 된 인도 출신 프로그래머가 케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업 로비스트들은 이 정책이 미국 내에서 프로그래머와 컴퓨터 전문가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 정책은 기업들이 급여를 삭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케빈은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이나마 받으려면 자신을 대체할 사람을 훈련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러한 지시는 그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모든 규칙에 따라 행동했는데도 그는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재능 있는 전문 직업인에게 씁쓸하고 슬픈 최후였다. 케빈은 캘리포니아 롱비치 지역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유명한 항고기 제조업체인 더글러스 에어크래프트에서 일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음악 교사였다. 아버지인 톰 플래너건이 애틋하게 기억하기로, 케빈은 탐구심이 강하고 질문하기를 좋아해 모든 것에 라는 질문을 던지는 학생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토론 모임의 주장을 맡기도 했으며 논쟁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

 

그는 롱비치에 있는 컬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컴퓨터 공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맥도널더글라스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보잉과 합병하기 전에 회사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1996년 뱅크오브아메리카에 입사하기 전까지 두 곳의 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이스트베이에 있는 뱅크오브아메리카 콩코드 기술센터의 작은 팀에 속하게 되었다. 4개의 건물로 구성된 센터에서 프로그래머들은 무수히 많은 은행 송금 거래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짰다.

 

케빈은 그곳에서 가정에 있는 것과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아들이 일과 동료를 좋아했고 업무를 잘 해냈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는 승진해 미국 동해안 지역으로 옮길 것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사양했다.

 

케브(Kev)는 그곳에 계속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이다. “그는 프로그래머들의 소규모 조직, 업무, 플레젠트힐(Pleasant Hill, 샌프란시스코의 만 인근 소도시)에 장만한 작은 집에 만족했습니다.”

 

하지만 은행은 갑자기, 아버지 표현대로라면, ‘망치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은행은 일자리 일부를 해외로 보내는 한편, 미국 정부의 승인 아래 이주 노동자로 들어온 인도인 프로그래머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이와 같은 노동력의 전환을 관리하기 위해 2002년에 인도의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아웃소싱만으로도 사태가 악화되었다. 케빈은 해외에서 발생한 실수들을 수습하기 위해 정신없이 불려다녔다. 한편으로 한 주 한 주 지날 때마다 케빈의 얼마 안되는 프로그래머 팀이 한명씩 줄어들었다. 외국인 이주 노동자가 더 늘어나는 만큼 그의 오랜 동료들이 회사를 떠났다. 마침내 팀은 축소되어 케빈만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케빈이 이젠 결국 시간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을 대체하기 위한 이주 노동자를 훈련시키는 지시에 매우 분개했다고 전했다. 이것은 그를 벼랑 끝으로 모는것이었지만, 그때는 누구도 그걸 몰랐다고 한다.

 

케빈이 그것을 알게 된 날이 결국 직장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2003417일에 그는 시카고에서 해고를 위해 찾아온 은행 담당자와 만났다. 담당자는 나중에 경찰에게 케민이 자살한 날 아침에 그를 만났으며, 퇴직금에 대해 설명하고, 회사 물건은 반납하도록 요청했다고 밝혔다. 또한 언제나 전문가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케민이 담담하게 모든 것을 잘 받아들였다고 진술했다.

 

플래너건 가족에게 상처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들은 아들이자 형제를 잃었으며, 톰 플래너건의 말 대로 미국도 건강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케빈이 화가 난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케빈이 수년간 열성을 다해 일했던 회사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도움이 필요했을 줄은 몰랐다.

 

출처 - 132-136(국가는 잘 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 도널드 발렛& 제임스 스틸, 어마마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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